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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산책] 아름다운 우리말 살리기

나는 세태에 한참 뒤떨어진 원시인이라고 자신 있게 말할 수 있다. 자랑스럽지는 않지만, 크게 부끄럽지도 않다. 그래서 한국을 온통 뒤흔들었던 ‘읽씹’이라는 낱말을 당연히 몰랐다. 읽씹? 어느 외국에서 들어온 욕설인 줄로 알았다. 검색을 해보니 설명이 나와 있다. ‘문자나 메신저, SNS의 메시지 내용을 읽었음에도 아무런 답신을 하지 않는 경우를 이르는 속어.’   ‘안읽씹’이라는 말도 있다고 친절하게 설명해준다. 아, 속어로구나, 그러면 그렇지! 한데, 메시지를 씹는다고? 왜 씹어? 맛있나? 메시지가 소시지의 일종인가? 씹는 거 좋아하다 보면 치과의사 좋은 일만 시키는 건데….   그러니까, 읽기는 했는데 아무런 반응이 없으니 기분 나쁘다, 자존심 상한다. 뭐 그런 말인 모양인데, 그렇다면 보고도 대답이 없으면 ‘보씹’이고, 듣고도 묵묵부답이면 ‘듣씹’이 되는 건가? 이건 너무하다.   아무튼 그놈의 ‘읽씹’ 때문에 한국 정치판이 온통 난리판이었던 모양인데, 나는 무슨 일인지 도무지 관심이 없다. 알고 싶지도 않다. 알아봤자 도움될 건 개뿔도 없고, 애매한 혈압만 오를 게 뻔하다. 다만, 내가 안타까워하는 것은 속절없이 무참하게 망가지고 있는 우리말의 신세다. 글쟁이 주제에 그런 아픔을 그저 멀리서 바라만 볼 뿐 아무것도 하지 못하는 내 무기력이 부끄럽고 서글프다.   이런 터무니없는 신조어를 아무런 비판도 망설임도 없이 대서특필하고 왕왕 떠들어대는 언론, 뭐 얻어먹을 거 없나 눈치 살피는 정치판, 재미있다고 낄낄대며 즐기는 대중, 못 본 척, 못 들은 척, 고상한 지식인들…. 소문으로는 ‘읽씹’을 실감 나게 발음하다가 혀 깨문 인간이 한둘이 아니란다.   세종대왕께서 내려다보며 눈물 흘리고 계신다. 극대노하지 않으시는 것만도 성은 망극이다. 이런 신조어를 ‘야민정음’이라고 부르기도 하는 모양이다. 감히 훈민정음에 빗대다니, 무엄하도다!   내친김에 자료를 찾아보니, 이런 신조어는 엄청나게 많다. 놀라울 정도다. 먹방, 먹튀, 라떼는 말이야, 불금, 내로남불, 가성비처럼 제법 익숙해진 것부터 웃안웃, 뇌피셜, 완내스(완전 내 스타일), 케바케(case by case), 텅장(텅 빈 통장)처럼 방금 탄생한 외계어 수준의 신조어에 이르기까지 현란하게 생성소멸을 거듭하고 있다. 드디어 ‘신조어사전’이 나왔을 정도다.   신조어에는 여러 가지 형태가 있는데, 아무래도 가장 많은 것이 줄임말이다. 젊은 세대의 생활방식이나 통신기기의 획기적인 발달에서 비롯된 현상이다. 긴 글 읽기 싫어하고, 사색은 질색하는….   쌤(선생님), 낄끼빠빠, 갑툭튀, 단짠, 넘사벽, 듣보잡, 솔까말(솔직히 까놓고 말해서), 이생망(이번 생은 망했다) 등등 기발한 재치가 빛난다. 그런데, 젊은 세대는 그렇게 아껴서 모은 시간에 도대체 뭘 하는지 궁금하다.   이런 말 중 ‘틀딱’이라는 낱말에 눈길이 머물렀다. 틀니+딱딱의 줄임말로, 틀니를 딱딱거리며 잔소리하는 꼰대를 칭하는 말이란다. 아이고, 무서워라, 죽어도 틀니는 하지 말아야지!   당연한 말이지만, 과도한 신조어 사용은 언어를 망가뜨리고 세대 간 단절을 부른다. 심각한 문제다. 특히 신조어에는 은어, 비속어 등이 포함되는 경우가 많아서 언어의 품격을 지키는 점에서 큰 문제다.   우리말의 순수성과 아름다운 가치를 지키는 노력은 문인들에게 주어진 신성한 임무이다. 글 쓰는 사람이나 배우들은 우리말을 지키는 최후의 보루이기 때문이다. 엉터리 신조어에 맞서, 우리말 구하기 대작전이라도 펼쳐야 할 판이다. 장소현 / 시인·극작가문화산책 우리말 엉터리 신조어 신조어 사용 한국 정치판

2024-07-25

[밀레니얼 트렌드 사전] 길티 플레저

‘길티 플레저’는 영어 길티(guilty·죄책감이 드는)와 플레저(pleasure·즐거움)를 합성한 신조어다. 어떤 일을 할 때 죄책감·죄의식을 느끼지만, 또 동시에 엄청난 쾌락을 만끽하는 심리다.   할리우드 영화 제목으로 쓰였다면 ‘조커(사진)’같은 사이코 살인마를 떠올리겠지만, 이 신조어를 설명할 때 언급되는 ‘죄’의 종류들은 대부분 소소하다. 친구들끼리 나누는 SNS 대화, 또는 TV 예능프로그램 자막에선 오히려 반전매력을 위한 가벼운 고해성사로 이용될 때도 잦다.     학창시절 부모님 몰래 만화방 가기, 자율학습 땡땡이치기, 수업시간 야한 잡지 보기 등을 해본 적 있다고 고백하는 건 나쁜 짓을 했다기보다 어른들이 하지 마라니까 일부러 삐딱하게 행동해서 ‘반항의 달콤함’을 즐겨봤다는 일종의 자랑이다.   악취미를 즐기거나 겉과 속이 다른 이중적인 사람을 설명할 때도 쓰인다. 남들이 알면 부끄럽고 민망한, 또는 스스로 생각해도 오글거리는 상황을 즐기는 취향과 태도를 비꼬거나 자조하는 경우다. ‘막장 드라마’라 욕하면서 실은 본방송 시청이 일상이고, ‘인생 샷’을 위해 수시로 출입금지 구역을 드나들고, 클래식이 아니면 음악도 아니라면서 휴대폰 앱은 트로트로 꽉 차 있는 사람들. 다만, 이 경우도 남에게 상처를 주진 않는다.   사실 죄책감과 기쁨이라는 상반된 감정이 공존한다는 것 자체가 위험한 일이다. 누군가에겐 디지털 ‘댓글’이 익명으로 화를 배설할 수 있는 쓰레기통일 수 있지만, 누군가에겐 개구리에게 던지는 돌이 될 수도 있다. 신조어 사용에 좀 더 신중하길 바라는 이유다. 서정민 기자밀레니얼 트렌드 사전 플레저 길티 플레저 신조어 사용 사실 죄책감

2023-09-25

[밀레니얼 트렌드 사전] 길티 플레저

‘길티 플레저’는 영어 길티(guilty·죄책감이 드는)와 플레저(pleasure·즐거움)를 합성한 신조어다. 어떤 일을 할 때 죄책감·죄의식을 느끼지만, 또 동시에 엄청난 쾌락을 만끽하는 심리다.   할리우드 영화 제목으로 쓰였다면 ‘조커’ 같은 사이코 살인마를 떠올리겠지만, 이 신조어를 설명할 때 언급되는 ‘죄’의 종류들은 대부분 소소하다. 친구들끼리 나누는 SNS 대화, 또는 TV 예능프로그램 자막에선 오히려 반전매력을 위한 가벼운 고해성사로 이용될 때도 잦다.     학창시절 부모님 몰래 만화방 가기, 자율학습 땡땡이치기, 수업시간 야한 잡지 보기 등을 해본 적 있다고 고백하는 건 나쁜 짓을 했다기보다 어른들이 하지 마라니까 일부러 삐딱하게 행동해서 ‘반항의 달콤함’을 즐겨봤다는 일종의 자랑이다.   악취미를 즐기거나 겉과 속이 다른 이중적인 사람을 설명할 때도 쓰인다. 남들이 알면 부끄럽고 민망한, 또는 스스로 생각해도 오글거리는 상황을 즐기는 취향과 태도를 비꼬거나 자조하는 경우다.     ‘막장 드라마’라 욕하면서 실은 본방송 시청이 일상이고, ‘인생 샷’을 위해 수시로 출입금지 구역을 드나들고, 클래식이 아니면 음악도 아니라면서 휴대폰 앱은 트로트로 꽉 차 있는 사람들. 다만, 이 경우도 남에게 상처를 주진 않는다.   사실 죄책감과 기쁨이라는 상반된 감정이 공존한다는 것 자체가 위험한 일이다. 누군가에겐 디지털 ‘댓글’이 익명으로 화를 배설할 수 있는 쓰레기통일 수 있지만, 누군가에겐 개구리에게 던지는 돌이 될 수도 있다. 신조어 사용에 좀 더 신중하길 바라는 이유다. 서정민 / 중앙SUNDAY 문화부장밀레니얼 트렌드 사전 플레저 길티 플레저 신조어 사용 사실 죄책감

2023-05-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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